소버린 AI, 꼭 이래야만 하나?
소버린 AI와 AI 윤리 레터의 3주년에 부쳐
그 열쇠를 돌리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단어들을 늘 신중하게 다루는 것이다.
—룰루 밀러 (정지인 역),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버린 AI, 꼭 이래야만 하나?
by 🤔어쪈
3년 (또는 5년 전) 탄생한 키워드
올해 5월, OOO이 3주년을 맞습니다.
아, AI 윤리 레터 역시 지난주 금요일(5월 15일)이 세번째 생일이었습니다. 필진 모두 기념일을 챙기기 쑥스러워하는 분들이라 아주 조용하게 넘어갔네요.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제가 의도한 정답은 오늘 주제인 ‘소버린 AI’입니다. 2023년 5월이니 오픈AI가 챗GPT를 출시한 이후 반년이 채 안된 시점이었네요.
단순히 익숙해진 것을 넘어 우리나라 AI 정책의 핵심 주제가 된 소버린 AI라는 용어를 정확히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유행어로 자리잡기 시작한 시점은 분명 3년 전 이맘때쯤이었습니다. 당시 업계에서 일하고 있던 제 기억과 기록에 기반해 간략히 기원을 추적해보겠습니다.


이제 정말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표현이 되었습니다. 출처: 정책브리핑
기업 전략에서 정부 정책으로
2023년 초로 시계를 돌려보겠습니다. 당시 네이버는 상당히 일찌감치 (이젠 많이 쓰지 않는 단어인) 자체 초거대 AI를 개발한 상태였고, 이것이 국가 단위로는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번째였다는 점을 내세워 챗GPT 열풍을 계기로 AI에 집중된 관심을 이어가던 중이었습니다. 더불어 AI 부문을 자회사인 네이버클라우드로 이관하며 하반기 내로 새로운 버전의 모델 ‘하이퍼클로바X’를 출시하겠다고 예고했죠. 공교롭게도 클라우드 업계에선 이미 ‘소버린 클라우드’가 트렌드로 자리잡은 상태였습니다. 이 때 소버린은 다른 무엇보다 데이터 주권, 즉 데이터 저장과 처리에 있어 이용 국가의 법률 및 규정 준수에 초점이 맞춰진 데이터 주권을 염두에 둔 표현이었죠. 동시에 국내 챗GPT 사용이 증가함에 따라 ‘세종대왕 맥북프로 던짐 사건’과 같은 우스꽝스런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네이버클라우드는 이러한 배경에서 한국어를 잘하고 한국 문화를 잘 아는 AI를 강조하며 소버린 AI를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미중 의존도를 낮추고 자체 언어 기반 AI를 개발하고자 하는 국가로의 기술 수출 전략으로 활용되기도 했죠. AI 사업에 뛰어든 다른 기업들 역시 이 뒤를 따랐습니다.

사실 음차가 아닌 ‘AI 주권’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시점을 짚다보면 그로부터 또다시 2년여를 더 거슬러가야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때도 같은 기업, 같은 인물이 주요 발화자로 등장한다는 사실이죠. 기술 종속 탈피, AI 삼국지, 기술 패권 경쟁, 디지털 영토, AI 전쟁 등 5년 전부터 차곡차곡 쌓인 언어들을 이제는 누구나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매우 이른 시점부터 기업들은 비슷한 수사를 이어가며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요구했죠. 윤석열 정부 역시 ‘초거대 AI 경쟁력 강화 방안’, ‘전국민 인공지능 일상화 계획’과 같은 산업 육성 정책을 펼치긴 했지만, 소버린 AI가 기업 전략을 넘어 국가 정책의 기반으로 자리잡은 건 아무래도 AI 기업을 이끌었던 인사들을 정부 요직에 앉힌 현 정부에 들어와서부터입니다. 이제 기업이든 정부든 너나 할 것 없이 소버린 AI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애국인 시대가 되었죠.
K-AI의 국산화 딜레마
가장 대표적인 소버린 AI 정책을 꼽을 때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이하 ‘독파모’)이 빠질 수 없겠죠. 작년 6월 공고 이후 ‘K-AI’ 칭호와 함께 5개 컨소시엄을 선정하며 착수에 돌입했고, 올해 초 1차 단계 및 평가와 더불어 추가 공모를 통해 현재는 4개 정예팀(LG AI 연구원, SK텔레콤, 업스테이지, 모티프테크놀로지스. 이상 주관사 기준)이 2차 단계를 밟고 있습니다. 올해 8월 2차 단계 평가결과를 통해 한개 기업을 탈락시키고, 내년 같은 과정을 한차례 반복해서 최종 2027년에 두 개 팀을 최종 선정한다는 것이 주요 계획 골자입니다.

과거 AI 윤리 레터에서 다뤘던 것처럼, 공모 시점부터 1차 단계 평가까지 높은 관심과 그에 비례하여 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점은 사업 이름에서부터 명시하고 있는 ‘독자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였습니다. 초기 어디까지 자체개발을 해야하는지를 두고 빚었던 혼선은 이른바 ‘프롬 스크래치’로 불리는 사전학습부터 직접 진행해야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지만, 이를 평가 시에 어떻게 확인할 것인지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소버린 AI 담론을 이끌었던 네이버가 아이러니하게도 탈락한 상황 역시 이미지 이해와 같은 모달리티 확장을 위한 추가 모듈에도 마찬가지 기준이 적용되는지를 둘러싼 해석의 차이가 발단이었죠. 이처럼 독파모의 한 축은 AI 기술의 국산화 정도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한편 사업 참여를 통해 개발한 AI 모델이 글로벌 수준의 성능을 갖추었는지 역시 독파모의 다른 한 축을 맡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호하지만 최신 글로벌 AI 모델의 95% 이상에 달하는 성능 확보라는 조건이 달려있죠. 현실적으로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독자성을 어느 정도 타협할 수 밖에 없습니다. AI 기술 개발에 필요한 여러 요소—데이터센터와 같은 물리적 인프라와 거기에 들어가는 반도체와 전력, 모델의 설계도에 해당하는 소스 코드와 모델 학습에 필요한 데이터, 사업에 투입되는 개발자를 포함한 여러 인력까지—를 전부 고려한다면 앞서 언급한 논란은 사소해보이기까지 하죠. AI 분야가 여전히 국경을 따지는 것이 무색한 오픈소스 커뮤니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고려하면, 아무리 ‘풀스택’ K-AI를 외치더라도 완전한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과 소버린 AI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국가대표 AI 기업인가, K-AI 모델인가?
아직 한가지 중요한 질문이 남아있습니다. 독파모, 더 나아가 소버린 AI의 본질이 무엇인가하는 좀처럼 의문이 제기되지 않는 물음입니다. 독파모가 세간의 큰 관심을 끈 이유로 서바이벌 오디션 형식을 차용한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죠. 반년 주기의 평가를 통해 정예팀을 하나씩 탈락시키는 것 말고도, 실현되진 않았지만 500명의 국민평가단을 모집해 투표 결과를 평가에 반영하겠다는 기획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업 진행 방식에만 주목하면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주관 및 참여 기업들의 면면과 더불어 어떤 회사가 끝내 경쟁에서 승리하는지에 대한 서사에 관심이 집중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사업 이름과 목표, 평가 기준과 대상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이 오디션의 진짜 주인공은 기업이 아닌 AI 모델이기도 합니다. 결국 독자성을 갖춘 성능 좋은 모델이 개발되어야 하니까요. 요컨대 독파모는 국가대표 AI 기업을 선발하는 동시에 엑사원, 에이닷엑스, 솔라, 모티프 중 한국을 대표하는 K-AI 모델을 선정하는 사업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한번 정리해볼까요. 한 회사가 구호로 내세웠던 소버린 AI는 업계를 넘어 정부에 가닿았고, 정부는 독파모라는 사업을 통해 2년여간 약 5300억원 규모의 예산을 투입, 기업 중심의 컨소시엄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국산 AI 모델을 개발하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독파모라는 사례에서 나타나는 소버린 AI의 본질은 국가대표 AI 기업이자 국산 AI 모델입니다. 하지만 소버린 AI가 이렇게 정의되고 실현되기까지 필연적인 귀결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적잖은 우연과 더불어 충분히 의문을 가질만한 가정들에 기반한 의도가 쌓여 지금에 이른 것이죠.
독파모는 올해 하반기와 내년 상반기 각각 2, 3차 평가를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어느 정예팀 또는 모델이 탈락하고 선정되었는지 그 결과가 아니라 독자성이라는 모호한 기준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와 같은 과정과 더불어 사업이 종료된 이후 국가대표 AI 기업과 K-AI 모델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가져오는지에 대한 정책에 대한 평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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