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곁다리화라는 말에 대해
한국 수어를 배운 경험을 통해 다시 생각해본 AI 시대
미래의 인간은 스스로 지능의 한계에 맞닥뜨려 더더욱 몸부림쳐야(struggles) 할 것이다.
—노버트 위너 (Norbert Wiener)
인간의 곁다리화라는 말에 대해
by 💂🏻죠셉
영화 <코다(CODA)> 보셨나요? 몇 달 전 큰 기대 없이 틀었던 영화에서 오래 기억하고 싶은 아름다운 장면 하나를 얻어왔습니다.
극 중 코다(Child Of Deaf Adults: 농인을 부모로 둔 청인 자녀)면서 노래에 재능이 있는 주인공 루비가 “노래할 때 어떤 기분이니?”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처음엔 “설명하기가 힘들어요.”라 말하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한참 뜸을 들이다 달리 방법이 없다는 듯 수어로 자신의 마음을 풀어내는 장면인데요. 이 장면은 루비의 수어를 자막으로 번역하지 않기를 선택한 감독의 연출이 탁월하다고 느꼈습니다. 약 20초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로지 루비의 수어로 장면이 완성되죠. 이전까지 계속 자막이 있었기에 당연히 화면 하단에 눈이 고정되어 있을 관객에게 ‘직접 보면서 마음으로 느껴보라’라고 말을 건네는 듯한 의도가 느껴졌던 멋진 연출이었죠. 이때 영화를 같이 보던 아내가 한 말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소리는 닫혔는데, 또 다른 세상이 열리는 기분이야.”

1년 남짓 한국 수어를 배우던 당시 제가 느낀 기분이 딱 그랬던 걸 떠올렸습니다. 줌 콜 화면 속 선생님의 손 모양에 집중하며 평소 쓰지 않던 얼굴 근육을 열심히 움직이다 보면, 저 너머에 내가 여태 가보지 못한 어떤 세계가 있는 것 같았거든요. 태어나 수어를 모국어로 익힌 사람은 당연히 수어로 생각하고 꿈까지 꾼다는데, 보는(seeing) 언어이자 공간의(spatial) 언어인 수어로 생각한다는 게, 심지어 꿈을 꾼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당시 오로지 수어로만 포착이 가능한 어떤 경험, 내가 음성 언어나 글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같은 것들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저를 매료시킨 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었죠.
평생 음성 기반의 언어를 써왔고, 그 방법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내가 공간으로 언어 하는 법을 익힌다면 그때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기존 나의 어휘와 수어의 어휘가 만났을 때 나의 언어는 어떻게 달라질까? 어떤 신선한 표현이 가능해질까? 안 배운 지 한참 돼 이제 가물가물하지만 지금도 수어는 ‘가능성’이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남아 있습니다. 이렇듯 나의 지각, 감각이 확장되길 기다리고 있다는 가능성. 내 안에 보물찾기처럼 창의적 방식으로 깨울 수 있는, 그런 미지의 영역이 내 안에 있다는 가능성이요.
장면을 바꿔서
아일랜드 국립대학의 법학과 교수인 존 다나허(John Danaher)가 쓴 도발적 논지의 기술 철학서 <생각을 기계가 하면, 인간은 무엇을 하나?>에는 ‘인간의 곁다리화’라는 재밌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역자가 덧붙인 메모에 따르면 원문에서 사용된 단어는 ‘Obsolescence’니까 일반적으로 ‘노후화’, 또는 ‘구식화’로 번역되었을 단어인데, 책이 말하고자 하는 뉘앙스를 잘 포착한 재밌는 번역이죠.
AI가 고도화되며 인간은 모든 영역에서 추월당하고 대체되는 미래가 마치 이미 여기 와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그중에서도 소위 ‘비저너리’란 사람들은 ‘대체’란 단어를 남의 일처럼 참 쉽게 사용합니다. (정확히 그것이 ‘남의 일’이기 때문이겠죠) 그런 세상이 온다면 우리가 비로소 ‘정말 가치 있는 일’ 또는 ‘창의적인 일’을 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 약속하면서요. 사실 잉여 시간이 생길지도 논쟁적이지만, 설령 그렇게 된다 한들 갑자기 창의적이고 의미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어도 괜찮은 걸까요? 그보다는 결국 영화 <월-E>의 한 장면처럼 등 따습고 편안한 안락의자에 누워 하루 종일 미국 드라마나 게임 방송을 보는 고도비만이 현실적인 미래 아닐지. 그때 나는 내가 속한 세계와 아무 상관이 없는, ‘바위처럼 풍화되어 가는 하나의 물체’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무의미의 세상’을 살아갈 인간의 존엄을 걱정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기술 업계 유명 투자자로 잘 알려진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바로 가상 세계로의 이주입니다.
(모든 걸 대신해 주는 AI 로봇 덕분에) 물리적 결핍이 해결된 세상에서 인간이 찾을 정신적·경제적 안식처는 디지털 공간일 수밖에 없다. 일론(머스크)이 화성을 개척하듯, 우리는 가상의 신대륙으로 이주할 것이다 (...) 잉여 시간의 바다에 던져진 인간은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로 진화하고, 가상 세계에서 새로운 경제와 문화를 창조함으로써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다.
영화 <매트릭스>나 <레디 플레이어 원>이 떠오르는 비전이죠. 흥미롭게도 앞서 언급한 존 다나허 또한 곁다리화의 해결책으로 가상 세계를 제시하는 걸 보니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이들도 많은 듯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해결책으로 인간과 기술의 결합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트랜스휴머니즘의 기치 아래 많은 실리콘 밸리 리더들이 이런 미래를 꿈꾸고 있음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령 뇌에 칩을 이식해 AI와 하나가 됨으로써 인간 지능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거나, 신체 능력을 강화해 AI에게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쉽게 단언할 수도 없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찜찜함을 느끼는 게 저 혼자는 아닐 겁니다. (가령 저런 세계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어디서 수급할 건가요? 우주 식민지화는 인간의 당연한 권리인가요?) 관련해서 요즘 저에게 가장 중요하게 느껴지는 질문은 이겁니다. 인간은, 그러니까 AI 시대를 살아갈 나는 기술에 힘을 빌리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더 이상 나아질 게 없고, 그저 대체되길 기다릴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요? 인간 존엄을 지키는 방법이라며 기술을 통해 더욱 강해지고, 거대해지고, 빨라지는 것밖에는 상상할 수 없는 듯한 이들의 말에서 마치 인간에 대해서는 이미 알만큼 다 안다는, 거기에는 더 이상 흥미로운 게 남아 있지 않다는 믿음 같은 게 엿보입니다.
’나’라는 가능성
그럴 때마다 저는 수어를 배웠던 경험을 떠올립니다. 아직 열어보지 못한 문, 혹은 우리 스스로 이미 닫아버린 어떤 세계에 대해 생각합니다.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이자 말년에는 기술 만능주의에 비판적이었던 노버트 위너는, 미래의 인간이 스스로 지능의 한계에 맞닥뜨린 이후 겪게 될 “몸부림(struggles)"에 대해 예언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몸부림'이 AI에 뒤쳐지지 않으려 애쓰거나, 기술과의 협업을 통해 겨우 자신의 효용 가치를 증명해 내려는 노력 이상이라고 생각 됩니다. 그보다는 효율, 정확성, 최적화 같은 '기계적 특성'을 능력의 유일한 척도로 삼으며 우리 스스로를 기계와 동일시해온 편협한 정의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고 더 이상 들여다볼 게 없다고 단정 짓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내가 여전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그 가능성을 기꺼이 탐구하는 용기가 아닐까 합니다. 다시금 그걸 믿어보기로, 상상하기를 포기하지 않기로 마음도 다잡아 봅니다.
이것이 꼭 인간만이 배타적으로 특별하다는 선언은 아닐 겁니다. 기계는 기계대로, 생명은 생명대로 저마다 뻗어나갈 길이 있다는 의미에 가깝겠지요. 최근 읽고 있는 조이 슐랭어의 <빛을 먹는 존재들>에서 다루는 '식물 지능'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부활미역고사리’라는 양치류 식물은 바짝 마른 상태로 무려 100년을 버티다가도, 물 한 방울만 주면 바로 원래의 생명력을 회복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책 한 권에 소개된 예시만 봐도 놀라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식물은 어떤 면에서 인간보다 훨씬 정교한 방식으로 세계와 소통하며 똑똑하게 살아갑니다. 자연이 그러하듯, 인간의 지능 또한 AI의 '논리'나 '계산'의 영역 너머에 (혹은 반대편에) 아주 넓은 스펙트럼으로 존재하고 있을 겁니다.
그게 뭔지, 어떻게 내 삶으로 가져올 수 있을지 사실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얼마전 페이스북에서 한 교수님이 준비 중인 ‘동네 감각 지도’ 강의 소개를 보며 작은 힌트를 얻었습니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3주간 이어폰을 끼지 않은 채 일상을 보내며 평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장소의 소리를 기록하는 ‘사운드 에세이’를 씁니다. 공장의 모터음, 지하철 문이 닫히는 소리, 빗소리, 그리고 자신의 숨소리까지... 단순히 소리를 듣는 행위를 넘어, 무뎌졌던 감각의 영역을 다시 확장해 나가는 작업입니다.
AI 시대에 ‘감각을 일깨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날로그로 돌아가자는 낭만적 주장이 아니다. AI는 사고의 속도를 극단적으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감각은 그 속도를 늦추며, 다시금 세계를 느리게 읽게 한다 (...) 이 문해력은 더 이상 언어를 잘 쓰는 능력이 아니라 세계를 듣고, 냄새 맡고, 느끼며 이해하는 새로운 형태의 지성이다.
누구를 착취하지 않아도 되는, 자원을 추출하지 않아도 되는 내면의 테크놀로지랄까요. 수어를 배우며 느꼈던 그 생경한 가능성처럼, 올해 남은 시간 동안 저는 이런 감각의 탐구에 집중해보고 싶습니다. 자연을 더 가까이 하려 합니다. 지금의 나를 전부로 생각하지 않고, 가상 세계가 아닌 나의 내면에 신대륙을 개척해 보고 싶어집니다. 인공지능 시대는 저에게 그런 도전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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