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노동이 데이터 노동이 될 때
AI가 바꾸고 있는 노동의 실태를 다시 한번 되돌아봅니다.
그래도 일하고 싶다. 생존에 있어 진실은 노동에 있어서도 진실이다.
—한승태, <어떤 동사의 멸종>
모든 노동이 데이터 노동이 될 때
by 🧑🎓민기
2026년 3월 6일, ‘빅4 회계법인’ 중 하나로 불리는 삼정KPMG에서 30대 회계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같은 회사의 같은 직급 회계사가 목숨을 잃은 지 겨우 3개월만이었습니다. 원인으로는 회사의 과중한 업무가 꼽혔습니다. 장례 기간에도 같은 팀 직원들은 야근을 해야 했고, 이러한 현실 탓에 일각에서는 목숨을 잃은 회계사의 업무를 누가 떠안을지 걱정하는 분위기까지 생겨났다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문제의 원인으로 AI 도입을 꼽습니다. 대형 회계법인들이 앞다투어 업무에 AI를 도입하려 하고 있지만, 정작 실제 업무 경감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신규채용 축소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회사에서 AI 활용을 권장하지만 오류와 할루시네이션(허위 정보 생성) 때문에 사람이 다시 검토해야 해 오히려 부담된다”는 증언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용 축소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2025년 공인회계사 시험 합격자 수는 1200명인데에 반해, 4대 회계법인이 채용한 합격자는 700명 내외였습니다. 회계법인의 저가 수주 경쟁으로 발생한 손실을 연장 근로로 메우는 구조도 과로의 원인으로 지적됩니다. “회사는 저가 수임 구조 속에서 인건비를 줄이려 AI 도입을 더 강화하려 할 것”이라는 악순환 예측도 나왔습니다.
비단 회계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의 노동이 만들어낸 데이터로 학습한 AI가 결국 노동자를 더욱 극심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콜센터 상담원이 있습니다. 2024년 한겨레가 콜센터 상담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약 44%가 ‘정해진 콜센터 업무 외에 인공지능 기술 고도화를 위한 작업을 수행한 적이 있다’라고 답했습니다. 또 그 중 대부분(86%)은 ‘업체로부터 정당한 보상이나 대가를 받은 적 없다’고 응답했습니다. 과거 노동의 부산물로만 여겨졌던 상담내역을 기업이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수집하고, 이들의 노하우를 기업의 자산으로 전환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일자리 축소로 이어졌습니다. KB국민은행의 콜센터 직원 수는 코로나 범유행 이전 2020년 1050명에서, 2025년 상반기 912명으로 급감했습니다. 다른 5대 시중은행 역시 감소 경향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이러한 감축은 비정규직과 하청업체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남아 있는 노동자들은 더욱 힘들고 어려운, AI가 만들어놓은 워크 슬롭(Work slop)의 뒤처리 역할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직접 데이터 노동을 하는 라벨러들의 실태는 더욱 열악합니다. 오픈AI의 화려한 서비스 뒷면에서 시급 2달러의 저임금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유해 콘텐츠 분류를 하는 케냐 노동자들의 사연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AI 뒤에 사람 있어요, 2023-06-26) 일감을 잡기 위해 평일에는 반려견을 산책시키지도 못하고 대기해야 하는 베네수엘라 난민 오스카리나 푸엔테스 아나야(Oskarina Fuentes Anaya) 씨의 사연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이는 최근 유행하는 ‘피지컬 AI’ 역시 별개가 아닙니다. 테슬라의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의 학습을 위해 일하는 ‘옵티머스 트레이너’들은 무의미하고 고된 육체 노동을 호소했습니다. 수집한 데이터를 통해 AI 기술이 고도화되고 기업이 바라는만큼의 성능에 도달하면, 이들의 일자리도 결국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창작 노동과 지식 노동의 결과물, 개인정보 등 가치를 인정받지도 못하는 새에 어느새 수집되어버린 우리의 데이터와 함께 말입니다.
일부 직업이나 직군의 경우, AI로 인해 새로운 기회가 열린 듯 보이기도 합니다. 개발에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오픈클로(OpenClaw) 개발자 피터 스타인버거(Peter Steinberger)의 무용담이나, 과기부가 주최한 “모두의 AI를 위한 전국민 AI 경진대회”의 의미 또한 그럴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발맞추듯 1월 30일 정부는 “국가 창업 시대, 고용보다는 창업으로 국가의 중심을 바꾸는 대전환”을 해법으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AI를 잘 활용하는 방법을 익혀서 살아남자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AI를 잘 활용하는 사람의 '노하우'는 과연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까요? 오픈AI와 같은 빅테크 기업들은 파생 서비스들을 집어삼키며 점점 ‘AI를 사용하는 노하우’까지도 자동화하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경험이 AI를 통해 자본에 흡수되는 것이 당연해진다면, 소규모 자본의 경영 경험이 더 큰 자본에 흡수되는 것 역시 당연해질 것입니다. 지금보다도 더욱 극심해질 창업 경쟁을 뚫고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입니다.
AI가 노동자의 경험을 추출해 시장에 내놓으면서, 노동자는 끊임없이 생산성을 향상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결국 AI가 작업을 대신할 수 있는 바탕은 과거의 노동자 자신의 데이터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삶의 궤적이나 노동 숙련의 흔적이라고 여긴 문화와 지식은 고유한 것이었고, 그것을 공유하는 것 역시 사람들이 직접 결정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고팔 수 있는 자산이 되면서, 일할 권리마저 이 데이터를 확보한 극소수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생산성 향상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의 갈 곳 역시 점점 좁아질 것입니다.
노동의 영역이 줄어들고 있는 시대를 해결하기 위한 담대한 제안도 있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만능 열쇠 같은 해법보다 사람들의 삶을 살피는 일이지 않을까요. 더욱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된 사람들을 보호하고, 데이터의 대가와 AI의 속도를 정하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되살리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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