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는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
비효율의 구원과 과정성에 대해
(일반적으로) 기술윤리 개념은 왜 특정 기술이 금지되거나 허용되지 말아야하는가와 연관된다. 사람들은 ‘윤리'라는 단어를 들을 때 이러한 개념을 떠올린다. 여기서 윤리란 누군가에게 허용되고 허용되지 않는지, 그리고 특정 사안을 금지하고 허락하는 찬반 논증에 관한 것이다 (...) 그러나 만약 우리가 거기서 멈추고 이것이 기술윤리의 전부라는 생각에 안주한다면, 우리는 매우 협소한 생각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스벤 뉘홀름, <이것이 기술윤리다>
데이터는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
by 💂죠셉
(오늘 에세이는 글의 톤을 살리기 위해 평어체로 썼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우리 집 책장에 신경 쓰이는 책 한 권이 있었다. 구석에 꽂혀 있어도 눈에 띄는 개나리꽃처럼 샛노란 커버, 100쪽 남짓한 두께, 흡사 혈서 같은 비장한 글씨체로 써진 책의 제목은 <5월, 그날이 다시 오면>이었다.
내가 그 책을 처음 열어본 건 초등학교 1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지금 책이 내게 없는 관계로 온전히 기억에 의존해 써보자면, 글자는 얼마 없었고 대신 끝도 없이 사진이 수록되어 있었다. 수백, 어쩌면 수천 장의 사진들이 보여주고 있는 걸 바로 인지하지 못한 나는 꽤 여러 페이지를 넘기며 피사체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고, 얼마 지나서야 비로소 그것들이 인간임을 인지했고, 그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국가가 휘두른 곤봉에 맞고, 군화에 짓밟히고, 총탄에 희생당한 인간, 이름 없는 주검들이 이제 알아보기 힘든 형태가 되어 책에 기록되어 있었다
잔인한 이들이 그날의 참상을 왜곡하지 못하도록 광주 가톨릭 교구에서 비밀리에 제작, 배포한 책자란 건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알았다 (한강 작가가 2024년 노벨 문학상 소감문에서 ‘광주 사진첩’으로 언급한 책자와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내가 뭘 본 건지 인식한 이후론 그 책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조차 무서워 늘 안 보이게 돌려 꽂아둔 기억이 난다. 어릴 적 비디오 가게의 공포 영화 섹션을 실눈 뜨고 지나가던 때처럼 고개를 멀리 돌린 채, 손끝으로 책을 들어 가까스로 그 작업을 수행할 때마다 손가락 마디마다 한기가 느껴졌다. 가끔은 안 보이게 돌려 꽂아둔 책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기도 해서 어린 마음에 그마저도 공포스러웠다. 책장에서 해방된 책이 마법처럼 휘리릭 열리며 그 무서운 이미지들이 내 앞에 펼쳐질 것 같아서 말이다. 사실은 아빠가 “이거 왜 이렇게 꽂혀있지?” 하며 원상복구를 해둔 거였겠지만.

2016년 여름,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으로 <채식주의자>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궁금한 마음이 생겨 어느 날 서점 매대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남들 다 사는 책은 사기 싫다는 꼬인 마음으로 집어 든 게 바로 옆에 비치되어 있던 같은 작가의 작품, <소년이 온다>였다. 맨부커상이 아니었다면 이 책과 만날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나는 한강이 누구인지도 몰랐을 정도로 문학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소설 읽으며 지새운 밤이 제법 많았는데, 학부에서 경제와 수학을 공부한 영향이었을까? 간간이 책은 읽고 있었지만, 얻어갈 것을 즉각적으로 내 손에 쥐여주는, 비문학 장르의 효율적 방식을 우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베를린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비행기가 이륙할 무렵 시큰둥하게 책을 펼쳤다. 부모님의 고향이자 어렸을 적 명절마다 찾던 광주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 막연한 호기심도 있었지만, 그냥 무슨 이야기 하는지 한번 들춰보기나 하자 정도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대충 훑어보고 (효율적으로) 줄거리를 파악한 후, 영화나 몇 편 보며 가야지. 그렇게 읽어 나가기 시작한 책의 서문에서부터 나는 태어나 생전 해보지 못한 희한한 경험을 했는데, 마치 이 책이 나를 어딘가로 초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묘한 기분에 휩싸여 홀린 듯 계속 읽어 나갔다. 작품 속 언급되는 익숙한 지명들을 따라가며 내가 향하는 목적지가 조금씩 뚜렷해지기 시작했고, 나는 한달음에 가기가 버거워 책을 덮고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다시 이어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희생자들의 영혼이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처럼 묘사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나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이 떠올렸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 속 그 노란 책을. 거대한 죽은 자들의 덩어리가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 했고, 그 수많은 얼굴 속에서 그 당시 광주에 있었던 나의 아버지, 어머니를 본 것 같아 먹먹해졌다.
착륙이 가까워진 무렵 책을 덮었을 때는 열 시간이 지나 있었다.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기에 서너 시간쯤으로 체감한 나는 화들짝 놀랐고, 승무원에게 당시엔 잘 마시지도 않던 위스키를 부탁해야만 했다. 책에 너무나 몰입한 나머지, 마치 온몸의 근육이 쥐어짠 것처럼,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 실제로 몸이 아팠기 때문이다. 사실, 이때 이후로도 많은 책을 읽었지만, 이런 경험은 다시 해본 적이 없다. 흡사 영적 체험 같았던 강렬한 경험이 남긴 상흔, 불세례가 지나간 흔적을 느끼며 그때 나는 알았다. 아, 내 안에 무언가 바뀌어 버렸구나.
‘광주 사진첩’이 언급된 2024년의 노벨 문학상 소감문에서 한강은 말한다. <소년이 온다>는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지, 그리고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할 수 있는지’를 물으며 쓴 책이었다고. 그가 의미했던 바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나는 2016년 여름 그의 책을 통과한 나의 과거가 나를 구했다고 믿는다. 문학에서 아득히 멀어져 있던 나를 다시 그 세계로 이끌어 준 건 분명 그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날 작가가 만든 세계 속에서 철저히 길 잃어버림을 경험한 이후로 나는 비효율의 세계를 다시 긍정하게 되었다. 가령 열 시간을 들여 책 한 권에 몸져눕는 일, 그리고 오로지 길을 잃기 위한 목적으로 시간을 쓸 수 있게 된 내가 좀 더 맘에 든다.
그래서 시간이 더 흘러 ‘GPT’가 관용어처럼 사용되고 ‘AI’는 일상어가 된 세상에서 나는 묻는다. 오랜 기간 인류가 축적한 방대한 데이터를 일종의 ‘과거’로 친다면, 신경망의 연결을 거친 데이터는 어떻게 나의 현재를 구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게 가능하긴 할까? 나는 아니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한 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매끈한 정답이 아니라 과정이며, 시간의 경과 속에서 경험되는 마찰이므로.
웹상에서 긁어온 방대한 데이터셋 대신, 아주 개인적인 일기나 현실 세계 속 활동을 기록한 이미지, 비디오, 소리 같은 내밀한 데이터가 충분히 축적되면 이 또한 제현 가능한 경험이라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르겠다. 더 많은 데이터만 있으면 다 된다고. 하지만 거기서 온 몸이 뒤틀리는 근육통이나, 손끝을 타고 올라오던 서늘한 한기를 느낄 수 있을까. 모든 게 자동으로, 순식간에 주어지는 세상에서 나는 무엇을 통해 질적 변화를 경험할까. 굳이 기억하는 수고의 고통을 잊어가며, 우리는 스스로에게서 무엇을 앗아가고 있는 것일까. 더 나아가, 나를 구성하는 기억의 상당 부분이 AI 챗봇과의 대화인 앞으로의 인간은 무엇이 되어있을지 나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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